728x90

엊그제 강의를 다 듣고 잠깐 쉬면서 사진도 정리할 겸 기록을 남긴다.

어쩔 수 없이 갈 수 밖에 없는 군대였지만, 지금 사회생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딱히 후회되지는 않는다.

다만, 의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다른 선택권도 훨씬 많았으리라 생각하니 아쉬울 뿐이다.

 

일반적인 직장인이나 공무원 등의 경우에는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지만, 군인의 경우에는 중간에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기본적으로 육군 항공장교가 된다면 장기복무 장교로 선발되어 의무적으로 10년을 복무해야 한다. 5년차에 전역하는 방법도 이제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의무복무 10년, 육군3사관학교 출신들은 의무복무 6년, 공군사관학교 전투기 조종사 출신들은 의무복무가 15년이다.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의무복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복무 10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10년을 군대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전익 조종사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군인이 적성에 맞는지부터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

군인도 국방부라는 행정기관 소속의 공무원으로서 일반적인 공무원과 다른 특별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순환근무 대상으로서 이사를 자주 다닌다.

물론, 군인도 공무원이니 민원에 취약하고, 민간인들보다 더 낮은 지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교육도 그렇게 받았고 실제로도 그렇다.

쉽게 말해서, 대한민국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첫 근무지는 강원도 철원군이었다.

최북단 격오지인데도 다른 곳보다 환경이 더욱 열악해서 화장실도 없는 2평 남짓한 방에서 소위와 중위 2명이 생활해야 했다.

이등병과 병장을 한 방에 집어넣고 함께 살라고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권 침해에 가까운 수준이다. 물론 10년이 지난 지금도 바뀐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1년차에 육군 항공병과에 지원해서 탈출하게 되었다.

 

 

항공장교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장소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태가 괜찮은 편이다.

보통은 동기나 상급자와 함께 1인실에 2명이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일단 혼자 생활할 수 있다면 괜찮은 편이라고 보면 된다.

이 때에는 휴대폰 비용 7천 원, 숙소 관리비 3만 원 외에는 크게 지출할 것이 없었다.

주변에는 논과 밭이 전부이며, 시내로 갈 수 있는 버스는 2시간에 1대가 배차되었고, 배차되는 시간도 불규칙해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는 카페라는 곳을 20대 후반에 처음 가봤다. 커피를 주문하는 법도 모르고 아메리카노가 뭔지도 몰랐다.

생전 처음 간 카페라는 곳에서 TV에서만 보던 베이글을 시켰는데 먹는 방법을 몰라서 헤메다가 대충 먹고 돌아간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이니 연애는 당연히 불가능했고, 그래서 전역 전까지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전역 후 결혼하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다.

대부분의 육군 장교들은 임관과 동시에 24세 정도에 결혼을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결혼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진다.

요즘에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많이 발달한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의 가족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장교로 처음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주말에 숙소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선배라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책을 하나씩 들춰보고, 주말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인터넷 사용기록을 뒤져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인이라면 주말에도 출근해서 할 일이 없는지 물어봐야 되는거 아냐? 영어 공부? 너 혼자 잘 되려고? 이기적인 놈이네?"

"할 일이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해야지. 군인은 자기 일만 잘 하면 되는게 아니라 선배들이 하는 일을 억지로 뺏어서라도 해야 돼."

"나라고 군대에 있고 싶어서 있는지 아냐? 다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참으면서 하는 거야."

 

나는 그 당시에는 그 선배라는 사람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비슷한 경험이 이어졌다.

결국, 군인이라면 당연히 평일에도 남아서 무조건 야근을 해야 하고, 주말에도 아침에 출근해서 반나절 정도는 일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진급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45세가 넘어도 진급이 되지 않아 전역하는 선배들의 모습들을 계속 봐왔기 때문에, 빨리 희망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전역 전까지 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토익, 토플 공부를 계속 했는데, 학원에 갈 수가 없으니 시중에 나온 모든 인터넷 강의와 토익, 토플 책을 전부 다 풀어봤다.

파견을 가는 경우가 많아 스마트폰 테더링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 토익 강의를 공용 샤워실에서 몰래 듣기도 했었다.

 

공부가 가장 잘 되었을 때에는 힘들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할 때였다.

어쩌다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 않다가도, 회식으로 6시간 동안 식사를 한 뒤에는 공부에 집중이 굉장히 잘 되었다.

도저히 이런 환경에서 살 수 없다는 각오가 다시금 새겨지면 또 몇 달 동안은 공부가 잘 되었다.

 

 

육군 항공장교는 파견을 많이 간다. 위 사진은 지방에 파견갔을 때의 방인데, 이 정도면 굉장히 깨끗한 최상급의 숙소라고 봐도 된다.

도착하자마자 항상 책상을 세팅해두고 퇴근 후에는 공부를 했다. 보다시피 공부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다.

 

이 당시까지도 차를 구입하지 않아 사진에 보이는 짐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어차피 1년 뒤에 또 이사를 가야 하니, 뭔가 구입하고 싶어도 또 이사를 갈 생각을 하니 물건을 늘릴 생각이 싹 사라졌다.

육군 항공장교로 생활한다면 평균 1년에 1번은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심한 경우에는 1년에 3번을 이사하기도 했다.

 

 

논산에 있던 육군 항공장교 관사이다. 아래에도 사진이 있는데, 5층짜리 구축 아파트의 방 한 칸이 주어졌다.

천장과 벽지는 검은 곰팡이로 덮혀 있었고, 주방의 싱크대나 바닥의 장판, 가구들은 건물이 지어진 뒤로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어차피 1년만 살 곳에서 굳이 돈을 들여서 인테리어를 꾸미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는 학술 교육을 위주로 하여 비행이 없었기 때문에 항공수당이 나오지 않아 월급이 많이 줄어들었다.

적금을 예전처럼 250만 원을 넣으려니 오히려 돈이 부족했다. 하루 식비가 3천 원도 되지 않아 하루를 빵 하나로 버텼다.

적금을 줄일 수는 없어서 일단 집에서 돈을 빌려 적금을 채우고, 다시 항공수당이 나올 때 모두 갚았다.

돈이 없으면 진짜로 굶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바닥 밑에는 지하도 있지만 말이다.

 

이 때 주변에서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성공에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더니 영양실조가 오고 정신도 맛이 가기 시작했다. 차비로 쓸 돈도 없어서 주말에도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공부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2억 원은 필요했는데 필요한 곳에 다 써버리면 돈을 모을 수가 없었고, 그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다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교육을 몇 달 받은 후 다시 배치되었는데, 다행인지 바로 근처로 배치되어 차 없이 직접 모든 짐을 옮겼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행거 하나가 들어가면 방이 꽉 찼다. 그래도 이 정도면 군대 숙소 중에서는 최상급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이 터졌다. 나름대로 잘 지내다가 추석이 되었는데, PX도 문을 닫아버려서 3일 동안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마트가 기차를 타고 2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기차역까지 가는 것도 버스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틀을 굶으면서 버티다가, 도저히 못 버티고 집에서 쓰던 중고차를 사왔다.

 

 

주말에 식사를 할 곳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주변 도서관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구내 식당에서 식사도 해결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출발해 1시간 정도 걸려 도서관 주차장에 도착 후, 차에서 잠을 자고 아침 6시에 직접 도서관 문을 열고 공부를 시작했다.

토요일 밤 11시까지 공부하고 다시 차에서 잠을 자고 일요일 아침 6시부터 다시 도서관에서 공부한 후,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공부하니 목표로 하던 한국항공대학교 APP 과정에서 원하는 요구조건을 모두 초과해서 달성할 수 있었다.

 

나는 군 생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사병들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적이 없었다. 커피도 못 탈 정도로 바쁠 일도 없었다.

사병들이 당직 근무를 서면 다음 날은 반드시 쉬도록 했고, 저녁이 되면 무조건 퇴근시키고, 꼭 할 일이 있으면 내가 남아서 했다.

어쩌다 같이 야근이라도 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휴가증을 주거나 외출을 보냈다. 일이 빨리 끝나면 무조건 쉬게 하니 업무 효율이 상당히 좋았다.

그렇게 업무를 보니, 그걸 보다 못한 상급자가 주말에도 출근해서 사병들이 쉬게 두지 말고 뭐라도 일을 만들어서 시키라고 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돈도 제대로 못 받는 사병들에게 그렇게까지 시킬 일도 없었고, 나 또한 진급 생각이 없었기에 그렇게까지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전출자를 찾는데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해서 파주 쪽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그나마 여기는 시내와 가까웠다.

 

 

여기서부터는 매주 주말에 토스트 마스터즈에 참석해서 외국인들과 영어 토론을 하면서 1년 넘게 보냈더니 영어 실력이 상당히 좋아졌다.

주말마다 영어 토론을 하면서 한국항공대학교 APP 과정에 시험 삼아 지원했는데, 바로 합격되어 다음 차수로 연기를 하고 그동안은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영어 회화 공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녁에 먹을 식사 외에는 지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에 많은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던 사람이 원어민들과 회화를 막힘 없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지불한 비용은 1년에 3만 원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여기는 군인들이 결혼하면 생활하게 되는 관사이다.

군인들과 결혼한 가족들이 처음에 이런 집과 주변 환경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데,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은 아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주변에 걸어서 갈 만한 식당은 중식당 하나, 그리고 편의점 하나가 전부였다. 어쩌다 식사 시간을 놓친다면 그냥 굶어야 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가족들을 데리고 살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해서 임관을 하자마자 결혼 생각을 애초에 접었다.

 

 

당연히 엘레베이터는 없고, 에어컨도 없다.

어쩌면 이런 열악한 환경에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적당한 결핍은 성취동기를 부여하고, 의욕을 불러 일으켜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위 사진은 군인으로 생활하면 자주 보게 될 풍경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히 살기 좋은 번화가에 속한다. 군부대의 강남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 정도면 최소한 일상 생활은 가능하다.

주변 환경이 이러니 자차가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런 환경에 익숙해지면 세상 물정을 몰라 사기를 당하기 쉬워진다.

자차가 있어도 문제다. 파견을 보낼 때 자기 차량으로 이동하도록 하는데, 유류비도 지원이 안되어 모든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내가 무언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괜찮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는 괜찮지 않았다. 그럴 수록 전역하겠다는 의지가 점점 더 강해졌다.

 

 

잠깐 육군 보병장교 숙소에서 지낼 때이다.

친한 친구라도 이렇게 좁은 방에서 같이 지내면 다툼이 생기는데, 소위와 중위를 한 방에 같이 집어넣는 발상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육군 보병장교로 임관하면 지내게 될 숙소가 위 사진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2인 1실이 기본이고 숙소가 부족해서 보통 2명이 함께 쓴다.

 

 

마지막 근무지에서 전역 신고를 하고 짐을 챙기면서 나올 때 찍은 사진이다.

이 당시에는 항공장교 대부분이 5년차에 전역을 했는데, 전역자가 너무 많아지니 국방부에서 전역을 계속 미뤄서 전역 당일까지 승인이 되지 않았었다.

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국방부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일 아침에야 겨우 승인이 되어서 전역을 하게 되었다.

 

만약 군대가 어떤 곳이고 어떤 환경에서 근무하게 될 것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기 때문에 바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지냈던 것이지, 알았더라면 분명히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만약 군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단 임관을 하게 되면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으니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다.

임관 후에는 전과자가 되지 않는 이상, 의무복무기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채워야 하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은 전역 후 거쳐간 비행학교와 올해 이사가게 될 다음 집에 대한 기록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