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 망한 것 같은데?"
군대에서 전역 후 항공사 조종사로 다 같이 이직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여러 가지 정보를 조합하여 심사숙고한 뒤에 내린 결론이다.
일은 힘들어 죽겠고 연봉은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오히려 깎이는 수준인데, 주변에서는 일도 별로 하지 않으면서 엄살을 부린다며 핀잔을 준다고 한다.
최근 아이를 낳은 한 친구는 자신이 외국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육아를 전부 떠넘기고, 아내는 자기가 출근하기 전까지 푹 쉰다고 한다.
외국에서 실컷 놀다가 왔으니 자기도 이제 좀 쉬어야 되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나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어릴 적에 내가 알던 항공사 조종사란 한 달에 출근 몇 번만 하면 연봉 1억 원 이상을 받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고소득 전문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보니 계산이 맞지 않았다. 출근을 몇 번 하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여유 시간이 없었고, 연봉이 높다고 했는데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그래서 왜 이렇게 바쁜 것인지 궁금해서 항공사 조종사로 일하는 주변 친구들의 비행 스케줄을 모아서 평균을 내보았다.
ㆍ항공사 조종사의 근무시간
아래의 표는 국내 항공사에서 조종사로 일하는 친구들의 비행 스케줄을 모두 모아서 평균을 낸 것인데, 웬만하면 아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행 임무(FLIGHT)는 주간 비행의 경우는 노란색, 야간 비행의 경우는 주황색으로 표시했다. 현실적인 비행근무시간을 고려하여 표시했다.
해외 체류(LAYOVER)는 평균적으로 24시간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 또한 근무 중에 준하므로 개인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다.
비행 대기(STBY)는 항공사에서 지정한 장소 또는 자택에서 대기하면서 항공사의 호출이 있는 경우에 즉시 출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날이다.
휴무일(DAY OFF)은 보통 한 달에 9일에서 10일 정도였고, 적을 경우에는 7일만 쉬는 경우도 있었다. 대신 쉬는 날이 적으면 다음 달 급여는 조금 더 많았다.
대한민국의 연간 공휴일 15일을 고려해보면, 한 달에 최소 10일에서 11일 정도는 쉬어야 일반적인 직장인이 가진 휴일의 수와 비슷해지게 된다.
계산을 해보니, 그나마 조종사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조금 더 쉴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 비행 대기(STBY)에 달려 있었다.
즉시 출근을 할 수 있도록 대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집에 있으니 집안일 정도는 할 수 있어서 제한적이나마 시간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한 달에 하루 정도는 대부분 비행 임무가 부여되기 때문에 전부 다 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교해보면, 실질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직장인은 일주일에 40시간을 일하고, 항공사 조종사는 일주일에 60시간 정도를 일하고 있었다.
항공사 조종사가 밤을 새면서 일한다는 조건까지 고려한다면, 업무 강도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휴무일에도 개인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다음 비행과 관련된 공부나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개인 시간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결론적으로 항공사 조종사가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동일한 시간을 일하더라도 업무 강도가 더 높았다.
그래서 항공사 조종사가 일반적인 직장인에 비해 낮에 조금 더 쉴 수 있다고 시간적으로 더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니, 주어진 시간을 더욱 아껴 쓰기로 했다.
ㆍ항공사 조종사의 연봉
"이번에 외국 항공사 채용이 또 열렸는데 지원할거야? 이번 조건은 지난 것보다 더 괜찮은 것 같은데?"
매번 외국 항공사에서 채용 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똑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다들 한국을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했지만, 막상 가족들을 데리고 외국에서 살 생각을 하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 다들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내 친구는 올해 연봉 1억 7천만 원에 성과금도 3천만 원을 받았대. 이제 주변 친구들 중에 내가 연봉이 제일 낮아."
그 말을 듣던 다른 친구는 회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에 다니던 여자친구하고 헤어졌어. 항공사 조종사는 연봉이 높지도 않으면서 집도 자주 비우고 전망도 불투명해서 비전이 없다고 말이지."
같은 나이에 비슷한 연봉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자료와 국내 항공사 조종사들의 연봉, 각 기업 규모별 직장인들의 연봉 정보를 조합하여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자료를 만들어 보았다.
계산을 해보니 그 격차의 결정적인 원인은 비행교육비였다.
예전에는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는 경우에 드는 총 비용은 6천만 원, 제트 형식 한정 취득 비용은 1,500만 원 정도로 생활비를 포함해도 1억 원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부터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지금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으려면 최소 1억 5천만 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항공사에서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제트 형식 한정 취득에 필요한 비용 2,000만 원을 포함하면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는 비용만 2억 원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경우에는 차량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하므로 자동차 구입 비용도 추가된다.
여기서 또 끝이 아니다. 여기에 추가되는 각종 수수료 및 예상치 못한 지출과 비행용품 등의 부가적인 비용 등을 포함하면 2억 원을 초과하게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 항공사에 취업하기 전까지 필요한 월세 등의 생활비까지 고려하면 총 지출은 2억 5천만 원에 다다르게 된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한국항공대학교 APP 과정은 실제 총 비용이 3억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그러면 기회비용이 6억 원에서 7억 원까지 치솟게 된다.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모든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고, 결혼, 아파트 구입 등의 모든 비용까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2억 원이라는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므로 가볍게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연봉 5천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균적인 지출을 한다는 가정 하에 2억 원이라는 돈을 모으려면 10년이 넘게 걸린다.
평범한 직장인이 항공사 조종사가 되기 위해 차곡차곡 모은 돈을 비행교육비로 다 써버린다면, 지난 10년의 인생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27세에 일반 기업에 취업 후 5년간 비행교육비를 모아 3년 뒤에 항공사 조종사로 바로 취업하더라도 35세에 가진 자산은 0원일 뿐이다.
누군가는 35세에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이미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항공사에서 일하는 주변 조종사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았다.
얼마 전에 동료 조종사에게 비행교육비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2억 원이 그렇게 큰 돈은 아니잖아? 돈이 필요했으면 다른 일을 했겠지?"라고 말했다.
사회초년생이 어떻게 고가의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국내와 해외에서 골프를 취미로 치고 다닐 수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는데,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순자산이 30억 원은 된다는 말이니 당연히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다.
ㆍ항공사 조종사의 직업 안정성
아래의 표는 고용노동부에서 조사한 근로자 평균근속년수와 평균연령, 학력별 임금을 나타낸 자료이다.
요즘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도 정년 60세까지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평균연령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꽤 괜찮은 기업에서 퇴직 후 비행교육을 받고 항공사 조종사로 이직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학벌이 꽤 좋은 편이었는데, 어떤 기장으로부터 학벌도 좋은데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이 직업을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공사 조종사가 평생 직장으로 꽤 좋아보여서 선택했습니다."
그 친구가 이렇게 답변하자 그 기장은 "그래? 과연 그럴까?"라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꿈에 그리던 직업을 가지게 된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다.
2억 5천만 원이라는 큰 돈을 투자했다면 다른 직업에 비해 연봉이 높거나 일이 편하거나 직업 안정성이 좋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매년마다 치뤄지는 3번 이상의 시험에 따른 스트레스, 매번 밤을 새고 시차가 뒤바뀌는 업무 환경, 정년 60세 이후에는 노후가 없다는 등의 어려움이 있다.
60세 이후에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도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아, 사실상 60세 이후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60세까지 일하는 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정년 60세를 다 채우기도 전에 건강 이상이나 비행 중 실수로 인해 퇴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안정적인 전문직이 될 수 있는 국내 의과대학의 평균 등록금은 1년에 985만 원, 변호사가 될 수 있는 로스쿨의 평균 등록금은 1년에 1,425만 원이다.
항공사 조종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비용으로 의사를 4명 양성할 수 있고, 변호사를 6명 양성할 수도 있다. 다른 직종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큰 금액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돈이 필요하다면 항공사 조종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그 동료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부렸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글의 내용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직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전적으로 여유만 있다면 다른 직종에 비해 취업하기도 쉽고, 꽤 매력적이고 성취감도 높은 괜찮은 직업이다.
다만, 나처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접근하기엔 고려해야 할 것이 꽤 많기 때문에 충분히 알아보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자신이 2억 5천만 원을 쓰는 동안 누군가는 2억 5천만 원을 벌고 있다. 그러면 기회비용이 5억 원인데,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간혹 항공사 조종사가 될 것이라며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대로 알아보고 결정한 것이 맞냐고 물어보면 다들 대답이 모두 똑같았다.
"네, 전부 다 확실히 알아봤어요. 저는 무조건 항공사 조종사가 될 거에요. 다른 직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비행교육비가 꽤 많이 들텐데, 얼마나 준비되었나요?"
"1억 원이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필요하다면 5천만 원 정도는 더 구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넉넉하겠죠?"
나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타인의 인생에 깊이 개입할 수도 없고, 이미 다 알아봤다는데 오지랖을 부릴 수도 없었다.
현재로서는 일단 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세상물정 모르던 군인 하나가 꿈을 이룬답시고 겁도 없이 돈을 펑펑 쓰다가 뒤를 돌아봤더니 지뢰밭이었던 것이다.
항공사 조종사만 되면 엄청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없었다면 그렇게 미친 듯이 파고들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직종이 유망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뭐라도 하는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