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에 대해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문학에서는 이야기의 문제는 오로지 이야기 안에서 끝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제3자의 뜬금없는 개입 없이 주인공 자신의 문제는 주인공 스스로의 행동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 규칙을 지키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중요한 부분 두 가지를 추려보았다.
첫 번째는 지니가 알리딘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만 결정적인 문제 해결은 주인공 본인이 해낸다.
한국 드라마나 동화에서는 뜬금없이 제3자인 백마탄 왕자가 갑자기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야기가 많은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개연성이 없으면 현실성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을 수 밖에 없다.
까치가 박씨를 물어온다고 해서 흥부가 그 보물과는 상관없이 본인의 노력으로 직접 부를 이루지는 않는다.
사슴은 나무꾼이 선녀를 얻도록 모든 계획을 짜지만, 나무꾼은 본인의 진심과 노력으로 선녀와 아이들을 얻지는 않는다.
호랑이를 피해 금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말하면 바라는대로 금 동아줄을 내려다준다.
영화를 본 뒤에 생각해보니 한국인과 미국인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은 단지 환경의 영향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이런 동화의 내용도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알라딘은 수 많은 램프의 주인 중 처음으로 지니를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원은 동굴에서 탈출하는 것, 두 번째 소원은 왕자가 되는 것, 세 번째 소원은 지니를 풀어주는 것이다.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그 약속을 지킴으로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스스로를 위기에서도 구해낸다.
결국 알라딘은 모든 것을 본인의 능력과 진심,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한 것이지, 지니가 직접적으로 해결해 준 것은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잠깐 왕자의 역할에 심취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위기에서 본인을 구한 것도 지니에 대한 진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타인을 위한 이타심이 없었다면 본인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니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이미 지금 주변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주변에 많은 지니들이 부모, 친구, 낯선 사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렇지만 절대로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겉을 그럴 듯 하게 꾸며도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자파같은 사람이라면 램프로 인해 자멸할 것이고, 알라딘같은 사람이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삶, 목표가 있다면 스스로가 변화하고 고쳐나가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내가 스스로 해 나가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