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경험에 틀을 부여하는 힘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행동하고 느낄 수 있다. 이 한계선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좌초하고 만다.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부담스럽고 암울해 보일지라도 먼저 일상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단테는 지옥의 소름 끼치는 세계를 구석구석 거치면서 인간이 천당의 문으로 왜 못 들어가는지를 절절히 깨달은 연후에야 비로소 천국의 휘황찬란한 세계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우연히 터진 한 사건이 한 사람의 진로를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모처럼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반대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직업의 종류나 근무 형태에 따라서 다르지만 우리는 1/2 ~ 1/4 정도를 근무나 공부, 식사 등의 생산 활동에 소비한다.
가사나 식사, 몸단장, 운전 등에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 자유 시간, 곧 여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전체 시간의 1/4을 쏟는다.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주장하였다. 여가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는 대충 매체, 잡담, 취미 활동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사회적 활동 영역에 시간을 엇비슷하게 투입한다.
첫째 영역은 안면이 없는 사람, 동료, 급우로 채워진다. 한 사람의 잠재력을 개발하는데 가장 중요하며, 위험 부담도 크지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주어진다.
둘째 영역은 가족이다. 사람에게는 유달리 끈끈한 정을 느끼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며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다.
셋쩨 영역은 타인의 부재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 고독의 공간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적 책무 때문에 좋은 싫든 혼자 지내야 할 때가 많다.
사람은 하루의 1/3을 혼자 보내기 때문에, 고독을 향유하는 수준은 못 되더라도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한귀로 흘려듣고 오직 그의 행동에만 무게를 두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자처럼 구는 반면, 스스로를 돌아볼 때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행동보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더 중시하면서 마치 현상학자처럼 구는 모순된 자세를 종종 보이곤 한다.
우리가 일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도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우리의 추구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 부여든 외적 동기 부여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을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과는 달리 몰입 활동은 명확하고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한 사람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중에서 운동이나 악기 연주 등, 능동적 여가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4에서 1/5이라는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시간을 사람들은 텔레비전 시청 같은 수동적 여가 활동으로 보낸다.
하루의 리듬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고립되어 지내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기댈 만한 언덕이 별로 없느 사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약해진다.
남들과 같이 있으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병리 증세도 혼자 있으면 불거진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직장에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아기와 대화에 몰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전통적으로 남자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자신과 가족이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주위에서 어떻게 구해 오느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자가 필요한 일을 해서 얻는 만족감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를 가건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남자는 무능력자 취급을 받는다.
반대로 여자의 자긍심은 전통적으로 자식을 키우고 가족에게 쾌적한 물질적, 정서적 환경을 제공하는 데서 나왔다.
성별 차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급 노동이 남자와 여자의 심리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다르기 때문에 일에 대하여 남녀가 보이는 반응도 대체로 다르게 나타난다. 서비스 직종이나 사무 직종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바깥일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에게 일은 마치 놀이와도 같아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 여자들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그래서 역설적으로 일을 즐길 수 있다.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가족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운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일은 산만함을 누르고 집중력을 살린다. 이상적인 경우는 일의 난이도가 일을 하는 사람의 실력과 엇비슷할 때다. 일은 게임처럼 몰입할 수 있고 보상이 따르는 활동 구조를 따르고 있다.
"내가 일평생 단 일분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말도 옳고, 내가 단 하루도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없다는 말도 옳다." 존 호프 프랭클린.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고 내면의 갈등도 심할 수 밖에 없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정신을 넓히는 데서 느끼는 희열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노령의 연구자들마저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이다.
시티코프사의 총수 존 리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는 한창 일할 시기에 활동을 중지하고 아이들 커가는 못브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일 년이었다고 말했다.
일벌레는 일에만 키쳐서 다른 목표나 책임은 안중에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일벌레는 직무와 관련 있는 도전에만 응하고 일에 관계된 기술만을 배우려 드는 편협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는 일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는 몰입을 경험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자 산도르 페렌치는 세기말에 이미 환자들이 다른 날보다 일요일에 유달리 히스테리와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것을 일러 '일요신경증'이라고 불렀다. 그 후로 휴일과 휴가 시간에 심리 상태가 오히려 악화된다는 사례 보고가 잇따랐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대부분 명확한 목표, 정확한 규칙, 신속한 피드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여가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일을 할 때처럼 창조력을 발휘하고 정력을 쏟아야 한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능동적 여가는 저절로 굴러오는 게 아니다.
일이 여가처럼 즐거우며, 일을 잠시 접어두었을 떄는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여가가 아니라 진정한 재충전으로서의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남들과의 어울림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직시하고, 그 영향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만사가 그렇듯이 인간 관계도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 득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성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결론짓는 사르트르의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에 봉착한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닐 경우 남자는 직장에선 기분이 별로였다가 집에 돌아오면 풀리는 반면, 아내는 퇴근하면 해치워야 하는 집안일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 서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우애가 돈독한 가정에서는 오히려 언쟁을 많이 보이고, 정말로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하루의 일과가 꽉 짜여져 있어 심리적 무질서를 낳는 기운이 사람의 의식을 사로잡이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 물리적, 정서적으로 고립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살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 두 극단성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 쉬우며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그것이 몸에 익어 활발한 어울림 아니면 쓸쓸한 고독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의 다양한 경험 영역을 축소하고 삶을 향유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정력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직장일에서 더욱 만족을 느낄 것이다.
일에서 얻는 보상과 인간 관계에서 얻는 보상의 의미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남자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는 식료품과 차고에 세워둔 두 대의 자동차가 화목한 가정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식이 사고 방식, 정서, 활동, 기억, 꿈을 공유하지 못하면 그들의 관계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간신히 유지된다.
흔히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엄청난 정력을 지속적으로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가족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정신적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가족이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주 잘 돌아가는 기업도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업가는 없다. 그렇지만 가정은 다르다고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미국의 기업 문화는 냉정하고 경쟁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며 에고가 강한 사람을 영웅으로 떠받는다는 고정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자세가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아 다소 안심이 된다.
리더는 개인적 이해 관계보다는 조직 전체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취미를 가지고 지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각박함에서 벗어나면서 업무도 한결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고, 이기심도 줄어들었으며 객관적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대화를 유익하게 나누는 비결은 따로 없다.
먼저 상대방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상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따져보고 따라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상대방이 던지는 화제에 호응해야 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겠다고 나서서는 안 되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좋은 대화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재즈 연주와도 같다. 처음에는 원래 악보대로 연주하지만 점차 임의로 변주하면서 기가 막힌 새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빠져나가는 시간을 수수방관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늘 시간이 부족하다.
관심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경험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의 질로 직결된다. 정보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레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기울이는 관심은 바깥의 사건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서 필터 구실을 한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끼는가는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다스리는 방식에 좌우된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불가.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지혜를 익힌 사람은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만족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상념의 무게 중심은 자기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되면 현재의 불안이 과거를 채색하고 다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를 더 암울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이 고리를 깨부수는 한 가지 묘책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자기 기분이 상승세에 있을 때 삶을 반추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보다 간접적으로 자아에 조화를 가져다 주는 목표와 인간 관계에 정력을 쏟는 것이다.
"심신이 건강한 사람은 자유 의지로,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추구할 때 가장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선용한다." 칼 로저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 니체.
우리는 한 사람의 영혼이나 공동체르 ㄹ어지럽히고 괴롭게 만드는 원인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대체로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하며 저급한 수준의 원리를 좇아 움직인다.
선은 경직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지켜나가려는 행위, 가장 발달된 체계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행위를 말한다. 선은 미래, 공동의 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행위를 뜻한다. 선은 타성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힘이요,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