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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아무도 계획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가 공급되고 소비된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적절한 때, 적절한 양만큼 생산되어 적절한 가격에 판매된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이러한 시장경제 체계를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지되는 기본원리를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라고 설명헀다. 이것은 국부론에서 제시된 스미드의 사상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우리는 백정이나 양조업자나 제빵업자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택에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이기심이라 함은 이러한 자신만의 이익을 꾀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지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시장에서의 경쟁이라고 한다.


스미드는 국부를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함으써, 금/은의 축적이 생산의 목적인 양 간주하는 중상주의 사상의 근거를 무너뜨렸다.

해마다 생산되는 부의 크기가 그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사회의 모든 사람이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에 의해 국부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는 스미드의 견해는 분명 진보적 철학의 표현이다.


근본적으로 조화로운 철학이지만, 현실은 소수만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겪는다.


사회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대중으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모든 고매한 노력도 결국은 허사가 되거나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기심이 아닌 박애정신이 삶의 동기이고, 강압이 아닌 이성에 의해 모든 사악한 성향이 바로잡혀지는 사회라 할지라도, 인간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 때문에,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회로 타락해 버리고 말 것 이다.


인간 재능의 모든 고상한 업적과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 야만과 문명을 구별해주는 모든 것은 재산권의 확립과 엄격한 이기심의 원리 덕분이다. 이 인구론의 의의가 오로지 유산계급과 노동계급의 필연성을 증명해 내는 데 있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종족보존의 본능, 즉, 성적 욕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자비심은 재앙을 부른다.


노동의 공급이 증가하면 반드시 임금은 하락한다. 노동 공급이 줄어들면 임금은 다시 최저 생활수준으로 회복된다. 인간의 성욕이 절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임금은 항상 최저 생활수준 주변을 맴돌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노동자들의 소득을 높여 주려는 모든 시도는 그 동기가 고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차 그들에게 더 큰 재앙을 안겨준다.


인구론에서, 산아제한을 할 정도로 난잡한 성적 교제는 인간 본연의 품위를 가장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것 같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또 그 온화하고 여성다운 성품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노동자는 속된 표현으로 하루살이처럼 산다.

이들은 눈앞의 궁핍에만 주의를 기울일 뿐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다. 저축할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이를 외면하고 눈앞의 필수품 이외에는 전부 술집에 가서 마셔 버린다.

난관과 유혹을 제공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자에게는 내세는 물론 현세에도 행복으로 보상해주는 성질을 가진 듯 하다.


인구론에서 말하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가진 사유재산이 그 사람의 성격, 인격, 인품을 반영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사유재산이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리카도는 지대는 토지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대가가 아니라고 한다. 지주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혜택을 독점하는 계급이다. 그들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 그들은 특히 자본가들이 차지해야 할 몫을 가져 가 버린다.


지주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대립한다.

차액지대론에 따르면, 토지가 공기처럼 균일한 것이라면 차액지대는 존재할 근거가 없다.

강남처럼 인구밀집지역의 땅값이 비싼 것은 주변 지역보다 비옥도가 올라가며, 그 가족이 연명할 수 있는 생계비가 올라간다. 여기에서 임대인들의 재능과 근면의 대가로 벌어들인 이윤은 결국 지주들의 금고로 들어간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으로 인구수가 줄어들면서 인구밀집지역이 줄어드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부동산 거품이 꺼진다고 할지라도 위성지역만 영향을 받을 것이지 핵심지역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해 부동산투자, 이런 경우에는 투기라고 해야겠지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는 끝이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자유무역론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지역이 특정 지역이나 계급에 편향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공정하게 보살펴 주는 세계정부가 존재할 때라야 온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나라의 정부 역시 모든 지역과 계층에 대해 공정한 정부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리스트에 따르면, 공업생산력에서 뒤진 나라가 앞선 나라와 자유무역을 할 경우 반드시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한다.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통해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은 오직 한 나라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지, 국가간의 거래까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드와 리카도에 따르면 노동이 부의 원천이다. 모든 부는 정신적 및 육체적 노동의 산물이며 빈곤은 나태의 결과이다.

부의 증가는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와 노동의 효율성 또는 생산성에 의해 좌우된다.


리스트가 정의한 정상적인 국민의 의미는, 공통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광대하며 잘 가꾸어진 영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한다. 농업 공업 상업과 해양업이 균등하게 발전해 있으며, 예술이나 과학 교육시설이나 보통교육은 물질적 생산력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 헝법 법률과 제도는 그 국민에게 고도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며, 신앙심과 윤리와 행복을 촉진한다.

한마디로 시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자립과 독립을 유지하고 외국 무역을 보호하는 데 충분한 육/해군을 보유한다.

그 국민은 후진국 국민의 문화에 영향을 주어 자국의 과잉인구와 정신적/물질적 자본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국민을 생성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제레미 벤담에 따르면, 도덕적 선악은 어떤 외부적 규범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판단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사는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행위는 따지고보면 모두가 좀 더 큰 쾌락을 얻고 가능한 한 고통을 회피하려는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의 행복이란 개인의 행복을 합친 것이므로 입법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큰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데 있다.


효용이란 어떤 대상의 성질, 즉 그것이 이해당사자에게 수익, 이익, 쾌락, 선 또는 행복을 주거나, 재난 고통, 악, 또는 불행의 발생을 회피시키는 경향을 가진 그런 성질을 의미한다. 무엇이 고통이고 쾌락인지 가장 잘 판단하는 주체는 각 개인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여 행복에 이를 것인지 모든 가치판단을 통해 선택을 하게되고 그 결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 상황이다. 자신의 상황이 불만족스럽고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본인의 가치 판단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호지스킨은 법은 어디서나 조심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함정이며 특별한 계급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는 장치라고 했다.

몇몇 송사와 법정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본 법이라는 것은,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의와 관계가 없으며, 살인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법이 정한 기준에서의 피해자라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생필품과 편의품의 양이라는 이론을 인정하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하된 노동의 양이라는 학설을 계승하였다.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가?

모든 것이 제값대로 팔리는 상황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부를 수 없는 자유방임시장의 메카니즘 속에서 어떻게 자본가는 막대한 이윤을 뽑아 내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가?

부의 원천은 노동력이며 노동력의 가치만큼 보수를 받는다.

노동자가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과 편의품의 양을 생산하는데 투하되는 사회적 필요노동량 (그 사회의 평균수준의 기술과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그 생필품과 편의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량, 하루에 6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 이 있다면, 하루에 6시간의 노동력이 필요한데 12시간을 일하면 6시간 분량의 잉여노동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생산된 물질적 부를 잉여가치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이윤이라고 한다.


일정한 양의 생산설비를 가진 기업가가 총이윤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노동자의 하루 노동과 그것에 의해 늘어난 한계생산물의 가격이 같아지는 점까지 노동을 고용하는 것. 노동을 그보다 적게 고용하면 더 큰 수입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보다 많이 고용한다면 그만큼 필요 없이 손해를 볼 것이다. 한 개별 기업이 총이윤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은 한계수입과 한계비용이 균등해지는 점까지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다.


조종사와 승무원이 부족하여 많은 시간을 일을 하며, 때로는 과로로 사망하기도 하는 시점에서 계획없이 증원시킬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벤담의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인간관과 관념적 사회관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쾌락에 대해 간섭할 수 없으며 윤리적 차이도 인정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얻은 쾌락과 매매춘을 통해 얻는 쾌락도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그것이 아무리 저속한 것일지라도 인간의 후생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에게 심리적 만족을 주는 모든 것은 선이다.

타인이 똑같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던, 것이 불법적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스펜서는 모든 인간은 점증하는 생계의 곤란의 압력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이 압력 밑에서 진보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한다. 살아 남는다는 것은 곧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쉽게 말해서 부와 권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계의 압력과 경쟁, 그리고 부와 권력의 소유자에 대한 후한 보상이 없으면 사회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상한 자비심이나 헛된 이상주의에 이끌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진보의 법칙을 저해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유한계급론에 따르면, 과시적 소비를 낭비라고 하였으나, 도덕적 경멸감이 내포되어 있지는 않다.

경제이론에서는 낭비가 합리적 지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낭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생활이나 인류의 복지 전체에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한 소비를 선택하는 소비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노력이나 비용이 낭비나 오용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선호에 따른 지출이므로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고유한 경제이론의 범위 내에서는 낭비라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과시적 소비는 경제 이론상 결코 재화의 낭비가 아니다.


유한계급은 보수적인 계급이다. 문화양식의 변화에 대한 이 계급의 반대는 본능적인 것이며 주로 물질적 이해타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행동방식이나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부터의 괴리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이다. 생활습관이나 사고습관의 변화는 모두가 싫증나는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나 힘겨운 일상생활에 모든 힘을 빼앗기는 사람은 내일 이후의 일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이것은 아주 부유한 사람이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품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제도이다. 누구도 그러한 체제를 계획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문제야 많지만 어쨌든 이기심과 자유거래와 경쟁이라는 뚜렷한 원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비트코인과 부동산 투기, 독서와 매춘, 절약과 사치 등,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 행동의 결과이며 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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